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문단 편집) == 2차 자금사건 == 이어서 이동휘는 1920년 1월 하순에 자신의 측근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였고 한형권은 1922년 겨울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러 레닌과 비밀협정을 성취시켜 [[볼셰비키]] 정부에서 금화 200만 루블을 새로 지원받았다. 1920년 10월 그는 이중 60만 루블을 우선 받았지만 60만 루블을 [[상하이]]까지 나르기 힘든 탓에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맡기고 40만 루블만 상해로 가져왔다.[* 한형권의 회상에 의하면 금화 40만 루블은 20푸드의 금이였고 러시아의 단위인 1푸드는 대략 16.38 kg다. 20푸드면 327.6 kg로, 당시 금이 1온스에 20.67달러 가량이었다. 금화 40만 루블은 24만 달러에 가까운 거금이다.] 상해로 가던 사이 그는 [[치타(러시아)|치타]]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로 코민테른이 파견해서 가는 [[김립(1880)|김립]]과 만나 이 자금을 임시정부에 안 보내고 한인사회당의 운동자금으로 쓸 것을 협의하였다. 12월에 많은 운동가가 김립이 상해로 가져온 코민테른 자금을 독립자금으로 썼지만 이 자금의 소재를 둘러싸고 상해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 사이에 알력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관계자는 이동휘에게 자금관계의 경과보고를 요구했지만 이동휘는 이에 불응했다. 그리고 김립이 코민테른의 일부 자금을 개인적으로 쓴다는 소문이 퍼졌다. 1921년 1월 이동휘·김립·한형권 등은 한인사회당 대표회를 소집하여 자금분쟁과 관련한 최종적 태도를 확정하고 마침내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